조선과 일본의 사신교류

 고려말 1350년 경인왜구의 침입 이 후 왜구는 끊임없이 한반도를 침탈하였다.
약 40여년간 500회에 못 미치는 침입과 약탈은 그 인원이 많게는 1만명 가까이 된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따라서 고려말 고려 조정에 속해 있기도 하였던 조선의 개궁공신들과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정책과 완전히 동떨어진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고려말에 왜구에 대한 정책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산신을 보내어 왜구의 침입에 대하여 항의하는 것이었고, 하나는 무력에 의한 대응이었다.
 사신은 박인 이후 정몽주등을 수 차례 보내어 왜구에 침탈에 대하여 항의하였으나 당시 일본은 남북조시대였으므로 보여주기식으로 왜구 몇 명을 참수하는게 당시 일본 정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외교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무력적인 방법을 시도하게 되는데, 공민왕이 5軍을 거느리고 순행에 나서는 한편 부병제를 복구하고 수군을 재건하는 한편으로 최무선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왜구의 침탈에 대응하였다.
 1392년 조선의 개국하던 시기에 일본에서도 아시카가에 의한 막부가 세워지는데 이가 바로 무로마치 막부이다.
태조시기 왜구에 의한 피로조선인들의 문제와 왜구 금압을 요구하기 위하여 일본에 승려 각추를 보내어 이를 요구하였는데 이것이 조선국왕이 보낸 사신이 막부 장군과 직접 대면한 최초의 사절이다.
이후 몇 차례 사신이 일본에 갔는데 이들은 일본이 약속을 지킨것에 대하여 예로 답한다는 의미의 회례사이다.
태종 4년 막부가 사신을 보냈을 때 처음으로 일왕으로 칭하는데 이는 막부와 조선이 중국의 조공책봉체제하에 같이 들어 간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이며 같은 체제하의 국가로서 막부의 수장을 일본의 외교권과 통치권을 조선이 인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즉 조선은 개국시기를 지나 전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조공책봉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일본과의 사신왕래의 명분은 교린의 도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통신사를 통하여 무역과 문화의 교류를 원하였다는 점이 차이라고 볼수 있다.
일본의 이러한 욕구를 위하여 공무역외에 무역이 가능한 항구를 개항하게 되는데 최초의 개항은 태종 7년부터 시작 되었다. 그러나 왜인들이 통제에 따르지 않고 무분별하게 내항하려하고 세종시기 쓰시마섬 정벌로 중단되었다가 쓰시마 도주의 간청으로 삼포를 열어 일본인들의 내항을 허가하였다.
 그리고 서계를 이용한 자들만의 도항을 하럭하게 하였는데 무분별한 도항이 이뤄지자 도서와 세견선의 구성등 조금 더 적극적은 통제책을 펼치려 하나 이는 쓰시마섬 도주가 조절 가능했으므로 한계가 있는 방법이었으며, 조선은 이러한 제도를 실시하면서도 도항한 왜인들을 사신의 예을 취하게 하였기에 조선과 일본의 입장차가 있다.
결국 사신의 예를 취하여 서울로 이들이 오게 되는데 이는 훗날 임진왜란의 진공로와 일치한다.
삼포시대에 왜인들에게는 교린의 일환으로 대했기 때문에 면세 등의 혜택을 주었었는데 중종 이후로 분위기가 변하여 혜택 들이 사라지고 일본인들을 멸시하며 학대하는 일에까지 미치게 된다. 결국 이에 불만을 표출한 왜인들에 의해 삼포왜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당시 부산포첨사 이우증이 항거 왜인들을 고되게 부리며 박대한 것으로 난을 일으킨 왜인들이 들기도 하였다.
 4000명이상의 왜인들이 모여 각지에 불을 지르고 난동을 피웠는데 부산포와 제포등이 함락 당하고 부산포 첨사가 살해 당하고 동래성 등이 공격당하고 피해가 커지자 조정에서는 군사를 보내어 폭동을 진압 하지만 민간인이 300명 가까이 죽고 재산 피해도 많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삼포제도를 철회하였다가 대마도주의 요청으로 규모를 훨씬 축소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임신약조를 맺게된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는 오닌의 난등으로 전국시대에 들어가고 각종물자가 부족해지자 일본인들이 조선에 다시 눈을 돌렸고 임신약조와 추후에 맺어진 정미약조에 의하여 무역량이 자꾸 줄어들자 조선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게 되는데 이는 곧 을묘왜변이다.
 무역이 더욱 통제되자 대마도주는 왜구의 목을 바쳐 사죄하며 세견선 증가를 간청 하였으나 증가 폭은 미미하였고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할때까지 혼란하여 중장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왜구들은 계속 침입해 왔다. 다만 이시기의 왜구들은 주로 조선보다는 중국을 목표로 하여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이들을 후기 왜구라 이른다.
신간이 흘러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였고 조선의 국왕을 자신의 발아래 다이묘로 보아 복속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대마도주는 이것이 더욱 양국관계를 경색시킬것이라 판단하여 수정하여 조선 조정에 전달한다.
 조선조정이 받은 내용은 수정된 새 장군 탄생의 사절청원 이었고 조정에서는 이에대하여 당시 만연하게 퍼져있던 왜국의 조선 침공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을 통신사로서 보내게 된다.
히데요시는 통신사를 맞이하여 정명가도를 요구하였으나 역시나 그대로 전달될 경우 파국으로 치달을것을 우려하여 다시 조공책봉관계의 회복을 위한 입명가도로 바뀌었다.
 이때 파견된 통신사는 일본의 침공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사신이었으나 대마도주의 독단으로 일으킨 행동과 김성일의 보고를 믿은 조선의 오판으로 임진왜란 시기 초전의 참패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초전에 참패하여 명군의 구원군과 함께 일본군을 압박해 나아갔는데 왜군은 조명연합군의 압박과 점령지 곳곳에서의 의변들의 활동 식량난과 추위에 전의를 상실하여 강화 회담에 들어가게 된다.
조선과 왜국의 타협점을 찾기위한 강화교섭은 3년에 걸쳐서 벌어지는데 히데요시는 7가지의 요구사항을 요구하였으나 한강이남지역의 일본 할양 요구나 명 공주와의 혼인등의 받아들일수 없는 요구들이 되풀이 되면서 강화교섭은 성과 없이 시간만 축내었고, 이 기간동안 군대를 재정비한 왜군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자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결국 조명연합군과 이순신등의 활약, 그리고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히데요시 휘하 5명의 다이로가 철수를 명하면서 왜군의 침입은 끝이 난다.
임진왜란 직후 동아시아의 정세는 위태로웠는데 북쪽에선 후금이 일어나 명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조선은 황폐화된 전국토의 복구와 피로인 문제를 해결해야했으며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지 얼마되지 않아서 국내릐 통제하는데 주력해야하는 시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소모적인 싸움이나 외교전을 할 필요가 없었다.
 대마도는 전쟁직후 식량이 바닥을 쳤기에 조선에 무역을 무조건 의지했으므로 피로인들을 수 차례 조선에 돌려보내며 다시 통신사를 파견해줄것을 요청 하였다. 그러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직접 허락하여 보낸 김광에 의하여 일본의 국내 사정이 알려지고 결국 막부의 진의를 알기위하여 사절단을 보내게 되는데 교린관계가 무너진 직후였기 때문에 통신사가 아닌 정탐하기 위한 사절이므로 탐적사라 명하여 사절을 보내게 된다.
 이들의 조건은 3가지로 왕릉을 도굴한 자를 내줄것과 책봉관계에 다시 들어 올것 그리고 피로인 송환 이었다. 이에 대하여 막부가 도굴범을 바로 보내며 적극적으로 응해오자 일본에 반응에 답하면서 동시에 피로인을 데리고 돌아온다는 목적을 가진 회답겸쇄환사가 막부에 파견되었다. 대대적인 사절은 2차에 걸쳐서 가게 되었다. 이들의 사절을 통하여 두 나라의 외교는 다시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부의 국서가 개작되는 사건이 벌어져서 막부의 대조선 외교 창구를 정비하게 되었다. 대조선 외교에서의 대마도주의 지위가 확인되었고 이 과정에서 막부의 승인을 맏을것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통신사의 부활도 시간이 흐르면서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일본 국내에서의 대조선 무역의 비중이 줄고 조선과 일본의 국내 상황이 변하였기 때문이다.
 통신사의 왕래는 양국 다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는 일이었는데, 당시 조선와 일본 모두 기근으로 재정이 말이 아닌 상태였으며 대조선 무역으로 들여오는 물품들이 일본에서 국내 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서 더 이상 크게 의미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막부 쇼군 이에나리의 승계 축하 사절 교섭에 들어 가는데 당시 기근과 폭동으로 국내가 안정 되지 않았던 일본은 대마도주의 사절단 파견 요청건데 대하여 연기 결정을 내리고 이를 위한 조선과의 교섭에 나선다. 조선은 이미 준비해 놓고 있었던터라 난감해했지만 이해하였고 막부의 대마도 역지빙례 요구도 결국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이에나리 승계 축하 빙례사는 24년이 걸려서 행해졌다. 이는 조일사신의 왕래의 의미가 양국간의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본다. 결국 이 통신사는 마지막 통신사가 된다.
 이후로는 양국간의 사정에 의하여 몇차례 더 통신사 파견에 대하여 의견 조율을 하긴 했으나 실제 파견으로까지 이뤄지지 못 하였고, 일본은 결국 미국에 의한 개국과 메이지 유신에 의하여 막부가 무너지고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통신사 파견과 조일사신교류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시대구분론

신라진흥왕릉고(新羅眞興王陵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