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의 절대왕정체제
프로이센의 절대왕정체제
-배경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17세기에 독일 지역을 휩쓸었던 전쟁의 시대가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도 독일에서는 영방국가들 개별적으로 주변국가와 동맹을 맺거나 분규를 빚었고, 심지어는 제국 내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고 이는 황제와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종교가 영방국가 내에서는 중요한 정치 갈등이 될 수는 있었으나, 국제적 분규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고, 대신 문제가 된 전쟁은 왕위 계승 문제였다. 이러한 잇따른 문제들로 독일의 영방국가 내부에 특정한 통치 패턴이 발전 했는데, 특히 몇몇 군주들은 항구적인 전쟁 상태 때문에 상비군과 이를 유지할 영속적인 제정 체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특정한 상황에서는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 시킬 수 있었다.
군주는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하여 돈이 필요했다, 신분의회가 상비군의 유지를 위한 세금징수를 거부하면 관료제로 육성된 관리들을 통하여 신분의회를 우회 할 수 있었다. 결국 신분의회를 우회하여 세금징수가 가능해지자 왕권은 강화되어 갔고 그런 왕이 사는 궁정 또한 발전하고 이때에 비로소 오늘날의 거대한 궁전들이 세워지게 된다.
궁정이 발전 하게 된 사회 경제적인 발전도 연관되어 있었는데, 16세기 말에 쇠퇴하기 시작하던 17세기의 전체적인 도시생활은 대부분의 도시가 한 세기 전보다 풍부 하지 못했다. 일단 유럽의 교역의 중심지가 대서양 연안으로 이동함에 따라, 독일의 도시는 16세기 초의 번영과는 멀어졌고, 그에 따라 시민 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자부심 약화를 가져왔다. 17세기말 영방내의 도시들이 누리던 자치와 자율성은 크게 축소되고 몇몇 도시는 상공업 중심지가 아닌 통치와 행정의 중심이자 군주의 거주 도시로 변화되거나 혹은 새로 건설 된다. 봉건적인 토지 귀족들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데 계속되는 전쟁에 의해 경제 환경이 변화하고 귀족들은 군주의 지원과 후견에 의존하게 된다, 즉 봉건귀족에서 궁정 귀족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프로이센의 흥기
국가의 관료화와 군주의 절대주의적 권력의 강화가 동시에 진행된 가장 두드러진 나라가 바로 프로이센이었다.프로이센은 상당히 특이한 나라였는데 왜냐하면 프로이센의 중심지는 브란덴부르크였지만, 동프로이센지역과 서부의 라인지방에까지 영지를 보유했다. 이 같은 사실로 서로 다른 문화적 전통과 경제구조와 정치제도를 가진 여러 지방들로 구성된 복합체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성세력의 복잡함은 불리함으로 작용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절대 왕정을 구축하는데 유리하게 작용을 하게 된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빌헬름(1640~ 1688)부터 ‘프리드리히 대왕’ 프리드리히 2세(1740~1786)까지 이어지는 동안 강력한 권력을 구축하고 행사했다.
1640년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ihelm v. Brandenburg)은 30년 전쟁이 끝난 후 영토 확장을 하여 마그데부르크(Magdeburg), 민덴, 니멘(niemen), 라인(rhein) 지방을 획득하였다. 아울러 그는 절대 주의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한다. 이에 따라 1644년 24.000명의 상비군을 조직하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시키기 위해 지방제후들의 조세동의권을 박탈한다. 그리고 재위기간중 벌어진 스웨덴과 폴란드간의 전쟁에서 폴란드로부터1657년 동프로이센의 독립주권을 부여받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경제적인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자들에게 종교적인 관용책을 펼쳐 베를린 및 주변 지역을 발전 시켰다. 1688년 프리드리히 3세로 등극한 프리드리히1세(Friedrich Ⅰ:1688~1713)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신성로마제국황제를 지원하며 참전함으로서 스스로 왕이 될 수 있었고, 또한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감소를 토질 향상과 이주정책으로 극복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의 후계자로 등극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iedrich Wilihelm Ⅰ: 1713~1740)는 상비군의 수를 4만 명에서 8만3천명으로 크게 늘려 ‘군인왕’(혹은 병사왕)이란 칭호를 부여받았다. 173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는 생업에 종사하는 모든 주민(농민과 노비 포함)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담 시키는 칸톤(Kanton)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로 프로이센의 전 주민은 소속부대로부터 9~10개월간 휴가를 받아 생업에 종사하였고 나머지 기간은 군복무를 수행하였다. 이에 따라 전 사회의 군사화체제가 구축되었다. 이는 이후에 계몽군주 프리드리히라는 인물에게 개혁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1740년 5월 프로이센의 위정자로 등장한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Ⅱ: der Grosse : 1740~1786)는 스스로를 국가의 제1공복(premier seviteur de l'etat)이라 자칭하였다. 그는 아버지와는 성격적으로 잘 맞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시키는 엄격한 군사적 훈련이나, 사냥 등에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반대로 프랑스 문학과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1750년부터 포츠담의 상수시(Sanssouci) 궁전에서 볼테르(Voltaire)와 자주 접촉하여 프랑스 계몽사상의 장점도 파악하였다. 이후 그는 프랑스의 계몽사상을 자신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였다.
법무대신 코체이(v. Cocceji)의 주도로 사법제도가 개선되었는데 왕에 의한 즉흥적 판결이 배제되고 3심제도의 도입이 개선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농민들의 부담도 크게 경감시켰는데 그것은 지주 계층에 의해 자행되었던 농토 몰수 및 부역(Frondienst)을 대폭 완화시킨 것에서 알 수 있다. 아울러 농촌의 관개사업과 토지 개량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내부 식민지화도 단행하였는데 그것은 900여개의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여 300,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프리드리히 2세는 일련의 정책을 펼쳤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첫째, 초등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였다(Generallandschulreglement). 둘째, 상비군 수를 배로 증가 시켰다. 그 수는 200,000명에 달하였다. 셋째,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Ermland, Danzig).넷째, 종교적 관용정책을 펼쳤다(Hedwigskirche in Berlin). 다섯째, 경제적 활성화 정책을 펼쳤는데 그것은 비단, 수건, 도자기, 유리, 그리고 철광분야가 활성화 된데서 확인할 수 있다. 여섯째, 대외교역에 대해 관심을 표하였다. 여기서 프리드리히 2세는 관방학(Kameralismus)이라는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는데 그것은 낙후된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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